요한계시록 2:1-7 복지교회의 비전 (1) 에베소교회 – 이동원 목사

설교 본문: 계 2:1-7

설교제목: 웰빙교회의 비전 (1) 에베소교회
설교자: 이동원 목사

최근 우리 사회를 강타한 화두 중 하나가 웰빙이다.

소위 웰빙 바람이 불었습니다.

“well”은 “좋다”를 의미하고 “be”는 “존재하다”를 의미합니다.

우리 사회에서는 주로 건강을 위해 사용하지만 원래 이 단어는 아름답고 풍요롭게 존재한다는 뜻입니다.

같은 성경적 의미를 가진 단어가 있는데 그것은 샬롬이라는 단어입니다.

샬롬을 우리말로 번역할 때 보통 ‘평화’라는 단어로 쓰지만 그 원래 의미는 매우 심오하여 우리 삶의 모든 면에서 질서와 생명과 기쁨이 충만한 존재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것이 웰빙입니다.

새해에는 우리 각자가 잘되고 우리 교회도 잘 되길 바랍니다.

2005년 첫 주에 우리 교회는 11번째 생일을 축하합니다.

11년 전 우리 교회가 창립되었을 때 정식 출산예배(1994년 1월 9일)를 하기 전 약 2개월 동안 요한계시록 2-3장의 소아시아 7교회 메시지를 묵상하면서 우리 교회의 비전을 갖게 되었습니다.

.. 존재하고 존재하는 교회여야 하는지 반성해야 할 바가 있었다.

사실 11년 후에 같은 본문을 다시 묵상하고 앞으로 10년 동안 우리 교회가 어떻게 다시 성숙할지 기도하고 싶습니다.

20세기 세계교회의 가장 큰 화두는 “교회성장”이었습니다.

그리고 한국교회의 성장은 교회성장운동의 물결 속에서 세계 최고의 모범 사례가 되었습니다.

성장의 은총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그러나 한국교회가 부실한 성장에서 돌아오는 길에 많은 역기능적 상처를 입고 교회 안팎에서 비판을 받아온 것도 사실이다.

이제 성숙이 성장보다 더 중요하며 특히 교회의 건강이 주요 관심사가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교회를 어떻게 생각합니까? 또는 “우리 사회는 교회를 어떻게 생각하는가?”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질문은 교회의 주인이신 주님께서 오늘날 교회를 어떻게 생각하시는가라고 생각합니다.

아마도 이것은 성경에서 교회의 주님께서 교회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직접적으로 드러내신 유일한 본문일 것입니다.

주님의 1세기 사도 요한은 로마황제 도미티안(AD 81-96)의 기독교 박해 때 전도하다가 포로가 되어 동굴에서 교회를 위해 기도하던 중 아시아 7교회 계시록의 음성을 들었다.

소소하고 오늘날의 터키가 내게 말하여 편지를 썼더라(요한계시록 1:9-11) 요한계시록 2-3장의 내용입니다.

7이라는 숫자는 완전함을 상징하는데, 7교회는 당시의 모든 교회가 아닌 오는 오는 시대의 모든 교회를 대표하는 교회로 선택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날 소아시아 7교회에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에서 오늘 우리 교회에게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이 7교회에 보낸 요한의 편지는 일반적으로 특정한 틀을 가진 형식으로 전개된다.

먼저 각 교회에 말씀하시는 발신자이신 주님을 보여주고, 그 다음에는 각 교회에 대한 찬양과 비난, 마지막으로 (이기는 자들에게) 경고와 권면과 약속을 제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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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먼저 에베소 교회에게 말씀하시는 주님을 바라보고자 합니다.

본문 2:1에서 주님은 오른손에 일곱 별을 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를 거니시는 것으로 묘사됩니다.

계시록 1장 20절에 따르면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이고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 곧 교회의 지도자들을 가리킨다.

주님이 교회의 주인이심을 계시하는 말씀입니다.

주님은 모든 교회에 지도자를 세우시지만 부활하신 주님, 살아계신 주님이 그들을 오른손, 강한 손으로 붙드십니다.

교회를 구성하는 너와 나의 부족함과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교회가 되라는 부르심에 부응할 수 있었던 것은 교회에 대한 그의 끈기 때문이었다.

소아시아 일곱 교회 ​​중에서 사도 요한이 먼저 에베소 교회를 언급한 것은 요한이 서신을 기록한 밧모 섬에서 가장 가까운 에베소 교회가 에베소 교회였고 에베소는 같은 롤레와 같은 도시였기 때문입니다.

당시 소아시아의 수도처럼 활동했으며 일종의 새로운 로마였습니다.

-로마). 원래 사도 바울은 2차 전도 여행 중에 에베소 교회의 시작을 듣고 3차 전도 여행 중에 이 도시의 선교적 중요성을 인식하고 약 2년 반 동안 에베소에 머물렀다(바울은 에베소에서 가장 오랜 시간 동안 한 곳에서 목숨을 걸고 전도를 시작한 교회였는데, 사도 바울이 에베소를 떠날 때 디모데를 교회의 지도자로 임명했다는 전승에 따르면 사도 요한이 도착했다고 합니다.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서기 67년경 오늘날 에베소에는 이스탄불의 소피아 대성당과 함께 터키에서 가장 큰 사도 요한 교회(요한의 무덤이 있는 곳)의 폐허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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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에베소 교회는 주님으로부터 어떤 칭찬을 받았습니까?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주님을 위해 끊임없이 다양한 봉사를 드리는 행위, 즉 그들의 전도를 위해 지칠 줄 모르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믿음의 교리를 보존하려는 시도였습니다.

2절을 보십시오.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 그릇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그것이 다입니다.

사도행전 19장에는 바울의 설교를 통해 아르테미스 신전(디아나) 주변에서 여신상을 만들어 팔던 상인들이 생계를 위협받으며 바울과 그리스도인들을 심하게 박해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도들은 움츠러들지 않고 복음을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고 전도하며 견뎠습니다.

더욱이 에베소 교회는 이단이 발판을 마련하지 못하도록 교리적 설득에 굳건히 서 있었습니다.

6절에는 니골라당이라는 이단 집단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학자들은 이들이 원래 예루살렘 교회의 일곱 집사 중 한 사람인 안디옥의 니콜라스(행 6:5)를 중심으로 불법과 음란에 빠진 무리라고 보고 있다.

에베소 교회는 이 방종을 단호히 거부했습니다.

복음은 우리를 자유롭게 하지만 호색에 이르지는 않습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필요한 칭찬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당시 에베소의 믿는이들은 주님의 교정이 필요한 치명적인 연약함을 드러내기 시작했습니다.

3. 그러면 에베소 교회가 주님께 받은 징계는 무엇입니까? 첫사랑을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4절입니다.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뜨거운 첫사랑도 식을 수 있다.

결혼은 사랑의 무덤이라는 말에서 나온 말인 것 같다.

그래서 결혼은 혼자가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과 에베소 성도들의 사랑도 이와 같이 변했습니다.

핍박을 받으면서도 품었던 따뜻한 사랑은 결국 식어가기 시작했습니다.

아마도 이것은 우리가 진리의 정당성을 옹호하기 위해 다른 사람의 신조에 대해 너무 비판적이었을 때 상호 불신이 시작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나는 사랑이 올바른 믿음만큼 중요하다는 것을 잊기 시작했습니다.

진실과 사랑의 균형을 맞추는 것은 항상 어려운 일입니다.

사랑을 강조하면 진리를 놓칠 수 있고, 진리를 강조하면 사랑을 놓칠 수 있습니다.

진실이 없는 사랑은 감상적이고 무력합니다.

그러나 사랑이 없는 진실은 결국 사람을 진실(피곤)하게 만든다.

4. 그렇다면 우리가 에베소 교회에서 배워야 할 복지교회의 비전은 무엇입니까? 답은 첫사랑의 열정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본문에서 이 비밀을 가르칩니다.

본문 5절의 권면에서 그 비결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첫사랑을 되찾는 비결입니다.

첫사랑을 잃은 연인들에게 추억과 후회를 안겨주기 위해 상담사들은 종종 추모여행을 권하기도 한다.

우리가 만난 장소, 첫 키스를 나눴던 장소, 프러포즈한 장소를 통해 우리는 문득 첫사랑의 감정을 되찾고 사랑의 서약을 기억하게 됩니다.

이처럼 우리는 주님을 처음 만난 곳으로 기도의 여정을 떠나야 할 때가 많습니다.

그곳에서 우리는 주님께 한 약속과 선택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어떤 이유로 당신은 그 성약과 그 목적에서 언제 왜 떠났는지 기억해야 합니다.

후회가 돌아옵니다.

탕자가 아버지의 품과 집으로 돌아가듯이 나도 내가 서야 할 자리로 돌아온다.

기도의 자리로 돌아가라는 뜻입니다.

말씀을 붙들고 살던 곳으로 돌아가라는 뜻입니다.

맡은 자리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말씀과 기도로 주님과 뜨겁게 교제하던 경건의 자리로 돌아가야 합니다.

부부간의 사랑이 식어지는 가장 흔한 원인으로 부부간 소통의 단절이 꼽힌다.

또한 기독교인들이 영적인 열심을 잃는 가장 일반적인 이유는 주님과의 교제를 상실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합니다.

우리 교회가 큰 일을 하는 것보다 영성이 살아있는 교회가 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많은 일로 분주한 마르다와 한 가지 일이 아니라 주님만 바라보는 마리아에게 좋은 편을 택하셨다는 말씀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웰빙교회는 첫사랑의 설렘이 살아있는 교회입니다.

주님을 생각할 때 여전히 사랑으로 뛰는 성도들, 주님의 이름을 부를 때 주님의 이름을 소망하기 때문에 기쁨의 눈물을 흘릴 줄 아는 성도들을 보고 싶습니다.

가끔은 이 시대의 성주의 사랑이 욘사마의 열정도 아니었을까 하고 가슴이 먹먹해진다.

Yon-sama는 Jesus-sama와 어떻게 비교됩니까?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자신의 존재와 생명을 무조건 주신 분이 아니십니까? 그 사랑을 알기에 주님께서 저와 교회를 부르신 교인 여러분이 그 사랑을 나누게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래서 이 서신을 쓴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에서 이렇게 가르칩니다.

“보는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요일 4:21)고 말씀하신 것은 다락방에서 가르치신 교훈을 잊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한복음 13장) :34-35) 이러한 사랑의 실천은 구체적인 사랑의 대상과 분야가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우리 교회는 1993년 11월 14일 65명을 모아 탄생을 준비했습니다.

2만 명 가까이 성장한 우리 교회가 여전히 초대교회의 사랑의 분위기를 유지하며 서로 사랑하는 공동체가 될 수 있을까요? 우리는 그것이 가능하다고 믿습니다.

이것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 주님께서 보여주신 비전이 바로 목장 교회를 의미하는 셀 교회입니다.

우리 이만 교인들이 서로 알고 사랑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우리 교회 안의 교회인 작은 목장교회에 들어가 12명 이하의 교인들을 나의 영적 가족으로 알고 사랑하는 것은 가능합니다.

그곳에서 예수님의 본을 따라 이웃의 발을 씻어주고, 서로의 상처를 안아주고, 사랑을 배우고, 치유를 경험하는 것, 이것이 우리 교회의 미래입니다.

사랑은 쇼가 아니다 사랑은 이벤트도 아니다.

사랑은 함께 사는 것입니다.

앞으로도 우리 교회는 일생에 한 번뿐인 행사를 위해 힘쓰고 신앙과 삶의 마당인 목장교회를 후원하고 섬기는 방향으로 더 나아가겠습니다.

그래야만 우리 교회가 우리 모두가 소망하고 꿈꾸는 복지교회가 될 것입니다.

로마 황제 도미티아누스(AD 96)가 사망한 후 사도 요한은 파트모스 섬의 유배지에서 풀려나 에베소 교회로 돌아왔는데, 전승에 따르면 그의 18개 설교는 “나의 자녀들아 서로 사랑하라”였습니다.

그가 불편함을 느끼자 제자들이 그를 강단에 앉히며 “선생님, 오늘은 새 말씀을 말씀해 주십시오”라고 말했습니다.

좋아요. 마틴 루터 킹 주니어가 노벨상 수상 연설에서 말했듯이 “아직도 세상을 움직이는 힘은 사랑입니다.

” 그들의 말이 맞습니다.

가정과 사회와 교회를 건강하게 하는 유일한 대안은 여전히 ​​주님이 가르치신 사랑입니다.

웰빙교회는 사랑의 공동체입니다.

우리 교회가 복지교회가 되도록 기도해주시겠습니까?